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객관보도의 양면성

저널리즘의 중요한 규범으로 간주되는 객관보도는 한계가 있으며, 오해도 적지 않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공정성도 저널리즘의 중요한 규범이다. 공정성의 구성요소는 정확성, 사실성, 객관성, 관련성 등이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규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장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다. 즉 두 얼굴, 양면성(ambivalence)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불편부당, 객관보도는 전략적 의례(strategic ritual)로 도입되어 정착되었으며, 최근까지 재생산되고 있다.

여기서 의례적(ritual)이라는 것은 객관성이라는 관행이 진실의 추구와 크게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전략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관행이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기자와 언론사의 방어시스템에 불과한 전략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전략적 의례

정부나 정치가 등 공적 정보원에 의존하는 객관보도는 마치 뉴스가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반대로 정부의 영향력이 흘러드는 채널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신화로서의 객관보도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업신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경쟁에 직면한 신문자본은 시장을 넓히기 위해 불편부당과 사실보도를 보도원칙으로 도입했다. 특히 일본에서 패전 직후 신문자본과 방송사는 GHQ에 유착했다.

이를 통해 신문사와 방송사는 전쟁 부역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가 있었다. 또한 사내 민주화를 억압하면서 ‘편집권’을 방패로 내세워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후 조직저널리즘을 구축해 거대자본으로 성장했다.

편집권 선언,신문윤리요강, 방송윤리요강, 보도준칙 등의 형태로 살아남은 객관보도와 불편부당은 지금까지 저널리즘의 중요한 원칙으로 쓰이고 있다.

다음으로 저널리즘의 원리로서 객관보도와 불편부당의 주장은 주관성 혹은 주체성의 배제를 요구한다. 즉 논평이나 의견, 평가를 금지한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사상으로서의 저널리즘

상업신문의 사상 배제

대중신문으로 발전하면서 저널리즘은 사상성을 잃었다. 그 빈자리에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저널리즘은 사상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저널리즘은 기자의 사상적 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행위는 의식활동에 다름 아니다. 저널리즘 자체가 기자의 의식적이면서 주체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상성을 뗄 수가 없는 요소이다.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사상으로서의 저널리즘

그렇다면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는 관점을 선택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실제 뉴스의 선택과 취재, 편집 등 모든 과정이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주관적이고 주체적 작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저널리즘의 사상성을 경시하고 사실성과 주관의 배제 등을 강조하는 주장은 기자가 가진 주체성과 비판정신의 억제와 관련된다. 특히 내부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직업현장에서 기자는 양심이나 윤리보다 사시나 편집요령, 프로그램준칙을 기준으로 삼으며, 권위를 가진 정보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발표저널리즘

결국 저널리즘은 객관성이라는 이념의 옷을 걸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양론 병기와 찬반 양론 제시, 논조 통일 등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균형이 잡힌 무명 기사와 논설, 뉴스, 보도프로그램을 양산하는 발표저널리즘으로 전락해 버렸다.

정부와 언론의 관계: 발표저널리즘
정부와 언론의 관계: 발표저널리즘

이것이 다름 아닌 공중의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방어장치로서 이용된 전략적 의례인 것이다. 서구에서 언론윤리는 언론이 스스로 규제할 수 있다면서 정부와 시민을 설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어내고 정부의 간섭을 미연에 배제함으로써 언론사의 독립과 자율성이라는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언론윤리는 언론사의 이익을 지켜주는 방패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애매모호한 규정은 쟁점을 숨기고 수학적인 중립과 균형에 수렴하도록 만든다. 이는 진실 추구나 정당한 사회적 비판을 불가능하게 한다. 비판정신을 회피하는 것은 권력이나 제3자에 의한 조작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저널리즘의 위상 자체애 내재하는 현실적 문제를 배제하고 은폐시켜 객관보도라는 이름의 권력추종을 만들어 낸다.

불편부당의 해석 주체

방송에서 불편부당과 공정성은 법률 혹은 이에 준하는 정부와의 협정서의 형태로 규정된다. 문제는 누가 이러한 규정을 해석할 것인가, 즉 방송제도의 규범인 방송의 자유에 대한 해석주체의 문제가 떠오른다.

그 실태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가 ‘츠바키 발언 문제’(椿発言問題)이다. 1993년 TV아사히의 츠바키 보도국장이 일본민간방송연맹 보도위원회에서 자민당 이외의 정권이 탄생하도록 보도했다는 발언이 보도되자 방송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해석주체 총무성
객관보도, 신화인가 규범인가: 해석주체 총무성?

이후 중의원 체신위원회에서 나온 당시 우정성방송행정국장 답변은 행정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방송행정국장은 정치적 공평이 불편부당의 입장에서 특정의 정치적 견해에 치우치지 않고 방송프로그램이 전체적으로 균형잡히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정성은 방송사업자에게 프로그램의 공정성을 설명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행정기관인 우정성이 정치적 공평 여부를 판단한다고 답변했다. 이 발언에 의하면, 공평의 판단기준으로 편향되지 않을 것과 균형 등이 제시되었으며, 이를 판단하는 주체는 우정성(현 총무성)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공평공정이 행정기관의 인정에 의해 담보된다는 생각은 일본 방송사의 행동양식을 규정하고 있다.

결론: 객관보도를 넘어서

이러한 의미에서 객관보도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의도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다. BBC는 초기부터 객관성보다는 ‘적절한’ 불편부당을 강조해 왔다. NHK도 객관성보다는 불편부당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지배적인 여론 속에서의 불편부당을 의미한다.

객관보도와 불편부당은 ‘합의의 틀’이나 ‘합법적인 논쟁의 영역’에 한정된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논쟁의 영역에서는 지배적인 생각에 기울게 된다. 객관성이 가장 거부되는 영역은 전쟁보도라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객관보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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