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저널리즘과 시민
사회학이나 신제도론의 뉴스연구는 기자와 정보원, 미디어와 정치권력(혹은 경제권력)은 탱고를 추거나 줄다리기를 한다고 지적한다(정보원과의 관계는 다음 글을 참고할 것: 정부와 언론의 관계(1) 적대, 경쟁, 역동). 그렇다면 공중, 오디언스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디언스는 탱고와 줄다리기를 구경만하고 있는가? 이들 연구에서는 대부분 정보원과 기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민이 없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동안 저널리즘은 오디언스를 능동적인 시민보다는 수동적 소비자로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인식에는 공중은 미디어나 정부와 동등한 파트너라기보다는 설득의 대상이며, 뉴스를 소비하는 시장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거버넌스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저널리즘과 오디언스
얼빠진 공중?
오디언스는 공중 혹은 대중으로 파악된다. 그 논쟁은 듀이와 리프만 논쟁(Dewey-Lippmann debate)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공중을 어떻게 보느냐에 기인하며, 규범론과 실태론으로 엇갈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만 사람들을 대중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뿐이라는 지적처럼 공중이나 대중은 허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리프만의 ‘얼빠진 공중’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리프만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하버마스(Habermas)나 듀이의 희망적인 시선을 빌릴 필요가 있다.
저널리즘에서도 마찬가지다. 규범적으로는 저널리즘이 봉사해야 할 대상은 시민이다. 정보원은 감시의 대상이다. 시민은소비자와 엄격하게 구분되기도 하지만, 소비자와 연결되기도 하며, 시민과 소비자를 같이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공중의 재발견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개념은 공중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산업화 과정에서 미디어의 상업화는 공중을 소비자로 전락시켰다. 공중은 분산되어 사회적 결속력을 잃었다. 공중은 구경꾼으로 전락해 주기적으로 그들의 승인이 필요할 때는 동원되지만, 정치문제에 대한 공중의 근본적인 관여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를 통해 공중이 재발견되었다. 행위자를 최종적으로 인증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것이다. 즉 공중은 저널리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능동적이면서 정보 습득 능력을 갖춘 지식공중이 대표적이다.
이에 공중은 주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공중은 수용자로 한정할 수 없으며, 오디언스라고 애매하게 불러서도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중은 저널리즘이라는 과정 속에서 주체적인 존재로 행위한다는 것이다.
뉴스생산과 오디언스
이에 비판적 연구에서는 저널리즘의 생산과정에 기자와 오디언스의 관계를 추가한다. 기자가 정보원에서 오디언스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을 복잡한 피드백이 존재하는 순환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기자는 정보원과의 관계에서는 유용성을 가치로 삼지만, 오디언스와의 관계에서는 적합성으로 뉴스가치를 판단한다. 즉 정보원과 오디언스의 사이에 있는 기자는 양자를 모두 고려하면서 취재하고 뉴스를 생산한다.
뉴스생산에는 기자와 정보원 이외에 오디언스도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은 줄다리기와도 같다. 기자와 정보원, 오디언스의 3자는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현실이 해석되고 뉴스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독자나 시청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널리즘과 거버넌스
거버넌스와 거번먼트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거버넌스(governance)이다. 미디어 거버넌스는 법과 제도의 영역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거버넌스는 미디어조직에서 그리고 미디어조직과 사회와의 제도적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경영과 설명책임의 다양한 형태이다. 즉 시청자나 독자의 관계를 규정짓는 중요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거버넌스는 미디어정책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미디어 시스템이 운영되기 위한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국가적이고 초국가적인, 중앙집중적이고 분산적인 제어메커니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거버넌스는 법적인 틀에 한정된 규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거버넌스는 단순한 규제패러다임, 법적 규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거번먼트(government)가 정부중심의 통치라면, 거버넌스(governance)는 다양한 유형의 네트워크와 협력관계를 가진 자기규제와 조정에 기초한 시민 중심의 접근방식이다. 거버넌스에서 시민을 뺄 수가 없다.
거버넌스와 협치
거버넌스는 통치가 아니라 협치, 공규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거버넌스에서 시민사회가 빠진다면 성립할 수 없다. 거버넌스는 다양화되고 복잡해지고 있다. 미디어가 시민사회에 위치하면서도 시장에서 작동하며, 정부기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버넌스는 복잡하다. 사회시스템으로서 미디어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서 동시에 기능한다.
이들 다양한 거버넌스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미디어 생태계는 깨지게 된다. 즉 거버넌스에도 긴장과 균형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공식적이면서도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거버넌스가 발달했다. 디지털시대에는 비공식적이면서도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거버넌스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비공식적인 거버넌스 가운데 시민사회나 전문주의와의 협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결론: 공영방송의 오디언스와 거버넌스
공영방송의 경우, 오디언스와 거버넌스는 특히 중요한 문제다. 공영방송은 불특정 오디언스를 대상으로 뉴스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편적으로 제공한다. 오디언스는 공영방송을 지탱하는 수신료(시청료)를 납부한다. 즉 오디언스는 공영방송의 재원을 제공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에 공영방송에서 시청자는 뉴스나 콘텐츠를 소비하는 오디언스에서 설명을 해야 하는 거버넌스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정치권력이 공중을 어떻게 생각하든 공영방송은 공중을 경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은 공중에게 설명책임을 다한 뒤,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야 한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이는 민방이나 신문사도 마찬가지다. 뉴스조직의 존재의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공중의 지지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공영방송가 시청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는가는 제도적 이념과 연결된다. 오디언스, 시청자는 시청자는 수신료를 납부하는 고객인 동시에 알권리의 대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