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8월 저널리즘이란?
일본에는 ‘8월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있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토 타쿠미의 책을 참고할 것). 8월 초부터 중순까지 연례행사처럼 방송과 신문에는 전쟁과 평화 관련 뉴스와 프로그램이 쏟아진다(참고글: 객관보도와 불편부당, 전쟁보도).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며,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8월 15일은 종전기념일로 불린다.
국제사회에서 종전기념일은 9월 2일이다.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전후 처리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일본에서만 8월 15일이 종전기념일이다. 아이니컬하게도 8월 15일은 일본의 추석으로 불리는 ‘오봉’(お盆)과 겹친다. 왜일까?
2. 8월 저널리즘의 기원
8월 저널리즘의 기원은 신문에서 종전 관련 기획기사를 보도한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미군정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특집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이후 유사한 방식의 기획이 사회면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라디오방송에서는 1953년 NHK와 민방이 8월 15일을 앞두고 특집편성을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와 토론프로그램, 해설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후 신문과 방송에 8월 저널리즘이 정착한 것은 1955년이다. 종전 10주년을 맞아 신문은 합창을 하듯 사회면과 사설에서 전후 일본의 변화를 보도했다. 또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을 전후해 특집기사를 실었다. 사설에서는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그러한 비극을 두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된다며 핵무기 확산금지를 주장했다.
라디오에서도 1955년에 대형 특집프로그램을 편성했다. 평화기념식을 중계했으며, 토론프로그램을 방송했다. 8월 15일에도 종전 10주년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TV에서는 NHK와 민방이 특집 좌담회와 영화, 르포 등을 방송했다. 일본에서 TV방송이 시작된 것은 1953년이다.
종전 20주년을 맞이한 1965년 8월에는 TV방송이 이전에는 없었던 규모로 전쟁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집중 편성했다. TV수신기가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TV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방송사는 8월 저널리즘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3. 8월 저널리즘의 변질
3.1 8월 저널리즘과 미디어 이벤트
이후 8월 저널리즘은 신문과 방송에서 정착되었다. 이에 8월 6일과 8월 15일에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고, 전쟁을 반성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일본 특유의 저널리즘이 형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8월 저널리즘은 하나의 미디어 이벤트가 변해 갔다.
8월 저널리즘은 종전을 기뻐하면서 평화를 기원하는 일본 독자의 역사공간을 형성했지만, 의례적인 이벤트로 변질되었다. 8월이 되면 정기적인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전쟁책임이라는 핵심을 빠트린 채 전쟁의 피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3.2 일본식 종전기념일
종전기념일을 지정한 것도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다. 종전기념일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이 아니라 8월 15일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오봉은 죽은 자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날이다. 오봉과 같은 날을 종전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종전을 일본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국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지우기 위한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쟁책임이나 역사인식에 대해 한국이나 중국과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우익 정권이 들어선 뒤로 더욱 강해졌다. 역사 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아베 정권은 역사교과서와 ‘위안부’문제에서 이전과는 달리 우익의 입장을 대변했다. 아베 정권에서 전쟁책임과 오키나와 집단자결, ‘위안부’ 등을 언급한 역사교과서는 사라졌다. 이는 기시다 정권으로 이어졌다.
3.3 2023년 8월 저널리즘의 양극화
2023년에는 8월 저널리즘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발단은 5월에 주요 7개국 정상회의가 발표한 ‘히로시마 비전’이었다. 이 비전에서는 핵억지력을 주장했는데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비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평화선언을 부정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지역신문은 핵억지력을 탈피해야 하며, 방위력 강화를 비판했다.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도 이에 동조하는 사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보수신문으로 알려진 요미우리신문과 산케이신문은 핵억지력이 기능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해서는 핵억지력이 필요하다는 논조의 사설을 실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동맹국이 핵무기를 강화하지 않으면 핵공격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후속보도에서도 요미우리신문은 눈 앞의 위협에 억지력과 반격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 앞의 위협이란 중국과 북한이다. 산케이신문도 핵확산 금지를 비판하며 일본인 전쟁희생자를 부각시키는 기획연재를 실었다. 이들 보수신문의 논조 밑바닥에는 일본의 핵무장을 깔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동안 금기시했던 핵무기를 용인하는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다. 일본에서는 비핵 3원칙을 주장해 왔다. 즉 핵무기는 제도하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의 핵무장을 지렛대로 일본도 핵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2014년을 기준으로 플루토늄 47.8톤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6,000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다.
4. 결론: 8월 저널리즘과 일본의 자화상
이상과 같이 8월에는 신문과 방송에서 전쟁과 관련된 기사와 프로그램을 보도하고 방송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을 표상하는 내러티브도 변하고 있다. 전쟁을 말하는 방식, 즉 내러티브는 초기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두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평화를 위한 노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전쟁 피해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논조는 아사히신문이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도 외부 인사의 의견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편향은 종전 이후 일본인의 전쟁관과 역사인식을 만들었다. 8월 저널리즘은 일본인이 자신의 앞뒤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과도 같았다. 그러나 거울이 너무 가까이 있어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독일과는 달리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면하지 않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오키나와의 비극만을 강조할 뿐이 주변국이 받은 비극은 외면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반성론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침략전쟁이 사라지고 방위였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일본 저널리즘이 갈라파고스(Galapagos)로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