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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다큐멘터리와 쟈니스사무소

은폐된 진실

‘J-POP의 포식자: 은폐된 스캔들'(Predator: The Secret Scandal of J-POP). 2023년 3월 7일 BBC가 방송한 다큐멘터리가 일본사회에 큰 파장을 불어일으켰다. 일본에서는 3월 8일 YouTube 공식채널 BBC News Japan에서 요약판을 공개했으며, 3월 18일 BBC World News에서 방송되었다.

BBC의 저널리즘, 적절한 불편부당

J-POP의 포식자는 일본 최대의 아이돌을 거느린 연예매니먼트사 쟈니스사무소의 전 사장 쟈니 키타가와(ジャニー喜多川, 이하 쟈니)를 가리킨다. 쟈니는 수십년간 소속 남자 아이돌을 성폭행했는데, BBC가 이를 폭로한 것이다.

쟈니스사무소는 1975년에 설립되었다. SMAP와 Kinki Kids, 아라시 등 일본에서 내노라 하는 아이돌을 거느리고 있다. 유명 아이돌을 거느리고 있는 만큼 영향력도 막강했다. 이미 20년 전에 쟈니의 성폭행이 알려졌지만,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이를 금기시했다.

BBC 다큐멘터리: J-POP 포식자

쟈니스사무소 소속 아이돌 인터뷰

프로그램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우선 쟈니스사무소 소속 아이돌은 방송과 영화, 이벤트, 공연 등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쟈니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쟈니는 일본에서 아이돌문화를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야시라는 가명의 남자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뷰에 응했다. 15살에 쟈니스사무소에 이력서를 보낸 하야시는 쟈니스의 합숙소로 불려갔다. 쟈니는 욕실로 들어가라고 한 뒤, 그의 옷을 모두 벗겼으며 쟈니가 그의 몸을 구석구석 씻어주었다고 말했다. 당시는 떠올리며 하야시는 눈물을 흘렸다.

슈칸분슌의 폭로

1999년에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이 쟈니의 성폭행을 폭로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 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쟈니스사무소에 밉보이면 시청률을 잃고 독자도 잃고 광고수입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미 쟈니스사무소는 미디어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상태였다.

오히려 쟈니스사무소는 슈칸분슌을 명예훼손으로 제소했다. 2003년 7월 도쿄고등법원은 슈칸분슌의 보도가 진실이라고 판단했다. 쟈니스사무소는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2004년 2월 이를 기각했다. 대법원 판결을 보도하는 언론은 없었다(메이저 언론의 침묵은 ‘짖지 못하는 감시견(2), 쟈니스문제와 공범‘을 참고할 것).

짖지 못하는 감시견, 쟈니스문제와 공범

당시 기사를 작성한 슈칸분슌의 기자를 인터뷰했다. 12살 정도의 소년이 모두 같은 체험을 말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기자는 취재한 사람들의 처지가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다른 피해자도 인터뷰했다. 10대에 쟈니스사무소에 들어가 10년간 있었다는 류라는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쟈니가 좋다고 말했다. 2019년까지 쟈니스사무소에 있었다는 렌은 유명해지는 것이 최고의 꿈이라며 지금이라도 그런 폭행을 받을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쟈니스사무소의 군림

쟈니스사무소 소사

일본의 거대 연예매니지먼트사인 쟈니스사무소는 1964년에 설립된 뒤, 1975년에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주로 남성 아이돌의 매니지먼트에 주력했다. 미국 LA에서 태어난 쟈니는 1952년에 일본에 온 뒤, 주일 미국대사관에서 통역을 하며 야구팀을 만들었다. 이후 노래하며 춤을 추는 탤런트 육성에 나서 1962년에 쟈니스를 설립했다.

1968년에 4인조 아이돌그룹 포리브스가 데뷔했다. 1970년대에 포크송과 소올, 디스코 등의 유행에 맞춘 아이돌을 육성해 차례차례 데뷔시켰다. 1975년에 주식회사를 설립해 법인으로 등록했다. 이후 본격적인 매니지먼트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일본에 아이돌문화가 대중화되었다. 특히 1987년에 데뷔한 히카리겐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히카리겐은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좁은 무대를 누비는 장면을 연출해 열풍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일본: BBC 다큐멘터니와 쟈니스사무소

1991년에 데뷔한 SMAP를 계기로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연기와 개그, MC 등 다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아이돌로 진화했다. SMAP는 음악과 함께 버라이어티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활약하는 국민적인 그룹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에는 TOKIO와 V6, Kinki Kids, 아라시 등이 데뷔하며 SMAP와 같은 만능 탤런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2000년대로 이어졌다. 쟈니스사무소 소속 아이돌은 음악프로그램, 버라이어티, 드라마 등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으며, 뉴스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0년대는 쟈니스사무소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인기 아이돌그룹이 민방은 물론 NHK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이때 데뷔하는 아이돌그룹도 많았다. 1999년 슈칸분슌에서 쟈니의 성폭행을 폭로했지만 쟈니스사무소의 위세는 흔들이지 않았다.

BBC 다큐멘터리와 고발 저널리즘

쟈니스사무소의 위세는 특히 방송업계에서 절대적이었다. 만약 쟈니스사무소 소속 탤런트가 출연을 거부한다면 민방은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쟈니가 사망하자 각계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장례식이 거행된 도쿄돔에는 8만 8,000명이 방문했다. 아베 신조 총리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쟈니스사무소의 수익구조

쟈니스사무소는 비상장기업으로 재무제표 등 경영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쟈니스사무소의 수익원은 팬클럽 회비이다. 회비는 입회금과 연회비로 구성되는데 쟈니스사무소의 안정적 수익원이다. 팬클럽 회원은 누계 1,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비만으로 매출은 연간 수백억 엔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외에 콘서트와 무대, 이벤트 등의 티켓수입, 굿즈 판매수입, CD 원판세 등을 거둬들이고 있다. 팬 중심의 비즈니스모델뿐만 아니라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 출연하고 있으며, 광고에도 출연빈도가 많다.

쟈니스사무소가 추구하는 팬비즈니스는 팬을 확대재생산하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데뷔를 꿈꾸며 연습생이 되고자 하는 아이돌 지망생, 연습생, 실제 활동하는 탤런트 등이 핵심이며, 이들을 밑천으로 팬층을 확대하는 구조이다.

OTT의 보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쟈니스사무소도 뒤늦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CD판매등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했던 쟈니스사무소는 2021년에 YouTube에 공식채널을 개설했으며, 2022년에는 스트리밍서비스를 시작했다.

쟈니스사무소는 이러한 팬비즈니스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오디션을 거쳐 아이돌을 발굴하고, 원석을 다듬어 훈련시킨 뒤 데뷔시킨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도록 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순환구조로 쟈니스사무소는 미디어업계에 군림해 왔다.

침묵한 언론: BBC 다큐멘터리와 쟈니스문제

쟈니스사무소의 매니지먼트 전략은 쟈니의 누나인 메리 키타가와(メリー喜多川)가 주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메리는 쟈니스사무소의 회장이 지냈으며, 쟈니의 성폭행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은폐했다는 의혹받고 있다.

쟈니스사무소의 몰락

BBC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이후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방송 이후 피해자가 실명을 내세워 증언하기 시작했다. 4월 12일 쟈니스Jr. 맴버였던 오카모토가 일본외국특파원협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쟈니로부터 15~20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슈칸분슌도 피해자의 증언을 보도했다.

결국 일본의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NHK가 4월 13일 방송에서는 처음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4월 말에는 민방과 메이저 신문에서도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쟈니스사무소의 늦장대응도 사건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쟈니스사무소는 BBC가 방송한지 2개월이나 지난 5월 14일에 그것도 홈페이지에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메리의 딸인 후지시마 쥬리 케이코(藤島ジュリー景子) 사장이 동영상에 출연해 성폭력을 인정하며 사과한 뒤 사장 교체를 했다. 쟈니스사무소가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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